나에게는 복수초 같은 언니가 있다. 복수초는 추운 겨울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겨 내고 얼음 속에서 피어나 봄을 먼저 알리는 꽃이다. 찬 얼음에 세수한 노란 꽃잎이 헤실헤실 웃는 키 작은 복수초를 보노라면 그 생명의 강인함이 경이롭기만 하다. 내 언니도 그렇다. 한겨울, 살이 에일 듯한 칼바람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고 꿋꿋이 일어섰다.


 제주도에 사는 언니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2001년 5월이었다. 목 뒤에 포도 알 만한 몽우리가 생겨 병원에 갔다가 비인강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몽우리는 콧속에 생긴 종양의 증상이 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우리 몸 어느 한구석이라도 암이 발생하지 않는 곳이 없다. 하지만, 언니의 콧속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암은 이미 많이 진행되어 육지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비인강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 생소한 병명 앞에 망연자실한 언니는 겨우 마흔다섯 살이었다. 아직은 너무나 젊고 고등학생인 아이들 뒷바라지에 할 일도 많은 나이였다. 가족들도 모두 믿기지 않은 사실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언니에게 왜 이런 병이 왔을까.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고생만 한 언니인데 그 힘든 생활의 스트레스가 암을 유발시킨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언니는 일곱 살 때부터 그 조그만 등에 동생들을 업어주기 시작했다. 엄마의 바쁜 일손을 돕느라 네 명의 동생을 등에서 떼놓을 날이 없었던 언니는 소아마비로 하여금 6살이 되도록 걷지 못한 나 때문에 더욱 많은 고생을 했다. 농번기 때는 결석도 많이 했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언니는 더는 공부할 수 없는 가난한 살림으로 돈을 벌고자 공장에 나갔다. 착한 언니는 다달이 돈을 집으로 부쳐왔다. 그 돈은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로 요긴하게 쓰이고, 그러한 생활은 결혼할 때까지 이어졌다. 언니의 결혼 생활은 그리 편치 못했다. 가난한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어 크고 작은 친정 일에 시댁 짐을 하나 더 걸머진 셈이었다. 형부는 착한 사람이었으나 떠돌이 직장생활로 생활이 늘 불안정했다. 하는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언니는 두 아이를 양 집안에 하나씩 맡기고 제주도에서 여행업을 시작하였다. 형부와도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게 되었는데 그 사이 암이라는 놈이 슬금슬금 언니의 콧속을 잠식하고 만 것이다.


 언제나 너럭바위처럼 크고 든든하던 언니의 등이 한없이 작은 모습으로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생인손 같은 맏딸이 가슴에 묻힐까 봐 새가슴이 된 엄마도 울고만 계셨다.   그때부터 온 가족은 비인강 암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언니는 오가기 편한 부산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하였지만, 서울에 있는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내 남편의 팽팽한 주장이 우리 집으로 올라오게 하였다. 때마침 우리 집 근처에 암 전문 병원이 있어 좋았다. 며칠 후, 큰 가방 들고 온 언니의 모습에선 병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렇게 멀쩡한 사람에게 암이라는 무서운 병이 기생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언니의 콧속에는 이미 계란 노른자처럼 동글동글한 종양들이 여러 개 모여 있었다. 첫 치료 단계인 항암제 투여를 위하여 입원하였다. 먼 고향에서 늙으신 엄마도 달려왔다. 엄마는 뜻밖의 소식으로 속을 얼마나 태웠는지 퀭해진 눈이 우물보다 더 깊게 들어가 있었다. ‘니가 와 여기 누워 있노?’ 하시며 다짜고짜 언니의 손목을 부여잡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딸의 병을 믿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 앞에 한바탕 눈물 바람이 일었다. 항암치료는 입맛을 떨어뜨리고 머리카락을 앗아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민머리에 한숨지으며 신경은 자꾸만 예민해져 갔다. 조그만 소리에도 시끄럽다며 짜증을 내는 통에 한참 웃고 떠들 나이인 초등학생의 두 딸은 야단맞기에 바빴다. 항암치료는 입 퇴원을 반복하며 모두 네 번에 걸쳐서 했다.


 항암치료가 끝나자 방사선 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콧속에 있는 종양은 수술할 수 없었다. 방사선 치료에는 방사선 물질을 몸에 직접 주입하는 내부치료와 일정한 거리에서 높은 방사선 에너지를 조사(照射)하는 외부치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언니는 외부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다.


 치료를 하기에 앞서 모의치료를 통하여 빨간 표시를 목에다 긋고 왔다. 그것은 주 5일씩 6주 동안 받아야 할 방사선 치료를 위하여 각도와 방향. 조사량에 맞추어 몸에 정확한 위치 표시를 해 놓은 것이고 절대 지워지면 안 된다고 했다. 언니는 6주 동안 그 표시된 부위에 매일같이 방사선을 쏘였다. 방사선 치료는 2~3분의 소요로 통증 없이 받을 수 있었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르고 있었다. 매일 같이 방사선을 쪼이는 목 부분은 피부색이 검게 변하였고, 입안은 건조해져 혓바닥은 가문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자연히 미각은 떨어지고 목 안은 걸레조각처럼 다 헐어 찢어져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다. 부드러운 수프를 끓여 티스푼으로 아주 조금씩 넘겨보라 해도 그것마저도 넘길 수 없어 눈물만 삼켰다.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보니 배고픔에도 먹지 못하는 이중고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운이 없으니 잠시 앉아 있는 것도 고통이었다. 그러나 하루도 거르면 안 되는 치료는 매일 받으러 가야 했다. 등에 붙은 홀쭉한 배를 움켜쥐고 힘없는 발걸음을 떼는 언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기진맥진하여 병원에 다녀온 언니는, 일수 도장을 찍듯 달력에 빨간 체크표시를 하여 하루씩을 지워 나가며 남은 날짜를 아득히 세어 보곤 했다. 마지막 일주일을 남겨놓고는 목소리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이불에 쓰러져 그만 포기를 하려 했다. 언니의 그 고통을 처음부터 지켜본 나로서는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는 말조차도 하기 힘들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눈에서 눈물만 줄줄 흐를 뿐이었다. 그러나 내 언니가 그렇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껏 이 악물고 살아온 세월이 얼마큼인데 여기서 포기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먼 제주에서 엄마의 건강한 모습을 기다리는 조카들을 생각해서라도 포기를 하면 안 되었다. 언니는 다시 실오라기만 한 힘을 모았다. 그렇게 눈물로 범벅된 6주간의 방사선 치료가 드디어 끝났다. 목구멍에 양잿물을 붓는 것 같은 그 타들어가는 고통을 잘 이겨낸 언니가 위대했다. 손을 번쩍 들어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날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치료의 끝은 아니었다. 언덕을 넘으면 산이 있고 그 산을 넘으면 또 더 큰 산을 넘어야만 하는 치료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콧구멍에 긴 호수를 꽂고 하루 동안 꼼짝 않고 누워 있어야 하는 특수치료가 남아있었다. 특수치료는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배설도 방광에 연결된 호수로 자동처리 하면서 반듯하게 누워 조금의 뒤척임도 없어야 했다. 의사 선생님은 기다란 호수를 언니의 콧속으로 끝없이 밀어 넣었다. 언니는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호수 때문에 캑캑거리며 눈물과 콧물이 또 범벅되었다. 언니는 그 불편한 호수를 꽂고 몸과 얼굴을 절대로 옆으로 돌리면 안 되는 중벌을 받고 있었다. 그동안 치료한 날에 비해선 가장 짧은 단 하루의 치료였지만 목구멍까지 넘어온 호수를 꽂고 옆으로 한 번 돌아눕지도 못하고 반듯하게 누워 24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은 바로 형벌이었다. 죄라면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하루가 1년 같은 벌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진 날은 또 없을 것이다. 드디어 모든 치료는 끝이 났다. 다행히 결과는 매우 좋았다. 이제 5년 동안 재발만 안 하면 완치라고 했다. 모처럼 언니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지는 날이었다. 얼마 만에 보는 웃음인지 몰랐다.


 6개월마다 정기 검진을 받으러 오기로 한 언니는 7개월간의 치료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제주도로 돌아갔다.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떠나는 언니를 웃음으로 배웅하였지만 언니가 머물던 텅 빈방에는 허전함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런 것을 보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고 했나 보다. 만약 언니의 치료가 잘 못 되었으면 어떡했을까 하는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제주도로 돌아간 언니는 예전의 몸을 만들기에 나섰다. 미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혀에 여러 가지 음식들을 갖다 대며 입맛을 찾으려 애썼다. 혀가 와락 거려 한 입도 댈 수 없던 매운 음식을 먹고자 노력도 했다. 잘게 자른 김치 한 조각을 약 먹듯이 물과 함께 삼켜가며 혀를 길들였다. 음식을 만들 때도 화학조미료 대신 다시마. 멸치. 마른 새우. 마른 홍합. 등을 갈아 천연조미료로 사용하였다. 식단도 제주도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과 해풍을 먹고 자란 신선한 채소와 고향에서 엄마가 부쳐주는 된장 등으로 토속음식과 건강 식단 위주로 짰다. 약해진 체력을 보강하고자 날마다 한라산 오름을 오르내리며 운동도 했다. 이런 노력과 함께 천성적으로 잘 웃는 언니의 웃음도 한몫을 했다. 언니는 조그만 일에도 잘 웃고 그 웃음소리는 호탕하기가 이를 데  없다. 옆에 있으면 도저히 따라 웃지 않을 수 없는 그 웃음은 강한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어 전염성이 강했다. 웃음에는 암세포를 억제해 주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했다. 웃을 때는 암을 일으키는 종양세포를 공격하는 킬러세포들이 많이 생성된다는 연구결과까지 나와 있으니 웃음은 분명히 언니의 몸을 회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리라 믿어진다. 1년 후부터는 찰랑거리는 머리로 여행업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언제 그 무서운 암을 앓았나 싶을 정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조랑말 같은 씩씩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인 까닭에 가끔 목이 잠겨 걱정도 하였으나 5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은 언니는 오늘도 씩씩하게 한라산을 오른다. 죽음의 공포가 성난 먹구름처럼 엄습한 날들이었지만, 강한 의지와 정신력으로 무거운 솜이불을 둘둘 말아 벽장 속에 집어넣듯 ‘비인강암’을 털고 일어선 언니다.


 봄이 머지않았다. 이제 곧 따뜻한 남쪽 제주에는 노란 복수초가 잔설을 뚫고 나와 해풍에 살랑대며 봄을 노래할 것이다. 암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를 찾은 내 언니처럼. 


                                                              


                                                                 200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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