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옥




‘모든 것은 지나간다. 지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도 헤어 나올 수도 없다고 믿었던 시련도 시간의 흐름속에서 희미해진다. 그래서 그 아픔을 잊고 오늘도 살아간다. 더욱 열심히.. 




2002년 봄의 끝자락부터였던가. 아랫배가 잠깐씩 아파왔다. 그리고 피곤감도 심했지만 워낙 건강한 체질인 탓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이어 고 3담임을 했고, 그 전해에는 결혼에 여러 생활상의 변화가 있던 탓에 ‘이제 몸이 좀 챙겨달라고 보채는구나. 보약을 먹어볼까’ 정도로 생각했었다.


여름방학에도 보충수업에 백두산 트레킹 여행에 바삐 살다보니 하루에 잠깐씩 아픈 배도 그러려니 하고 잊고 지냈었다. 다시 2학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도 통증이 계속되자 그때서야 한번 병원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할 정도로 너무 나의 건강을 자만했던 것 같다.


동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아보았지만 난소에 5cm정도의 혹과 염증소견이 나왔으나 특별히 치료를 권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을 했었는데, 계속되는 통증과 조직검사 이후 계속된 하혈기로 인해 결국 큰 병원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편이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어서 10월 말에 남편을 보내고 병원에 가게 되었다.


서울의 낯선 큰 병원, 홀로 검사를 다녔다. 그런데 그 몇 달사이 난소의 혹은 9cm커져있었고, 뭔가 이상한지 의사를 바꿔가면서(종양학과 의사로 교체) 검사를 하는데 한 달의 시간이 걸렸고, 결국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결정이 떨어졌다. 그때는 단순히 혹을 제거하는 수술인줄 알았고 수술 1주일 전, 검사를 위한 간단한 수술을 하였다. 누구나 다 그런 과정을 겪는 줄 알았다. 프랑스로 간 남편도 다행히 시간을 낼 수 있어서 급하게 수술 이틀전에 귀국을 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수술 전날 오후. 시차적응도 안 되는 남편과 함께 ‘요즘 자궁이나 난소에 혹 제거하는 수술은 쉽데, 금방 괜찮아질 거야’ 하며 보자기에 싼 이불을 가슴에 안고 입원을 하려고 주치의를 만났는데. ‘자궁내막암 2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암에 대한 설명과 수술 시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에 대한 설명... 어떻게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암’,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남편과 나는 눈물이 나왔지만 그 상황이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아이도 없는 나에게 자궁적출수술이라는 것, 그것보다도 우선 암이라는 것, 그리고 2기는 뭐지, 어떤 상황이지.. 모든 것이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밤을 어찌 보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 놀라실까봐 오빠들에게만 우성 연락을 했고, 이어지는 수술을 위한 예비 조치들, 놀란 가족들이 연이어 입원실로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울음소리들, 놀란 가슴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남편.


그래도 어김없이 아침을 밝아왔다. 너무도 놀라서 부모님들이 오시고, 절대로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펼쳐진 것이다. 수술은 6시간에 거쳐 이루어졌고, 그 시간 가슴 졸이며 슬퍼하고 아파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죄송하고 가슴이 아프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대수술이었고, 임파선도 많이 제거해서 왼쪽 다리도 불편할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자궁내막암 3기라는 판정까지..


그 시간은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친정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가족들은 가족대로, 어디서 왔는지 모를 힘으로 버텼다. 그리고 회복하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암진단을 받고 바로 다음날 수술, 회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오히려 ‘암’에 대해 알아보면서 느끼게 되는 공포나 두려움을 줄여준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냥 수술했으니 괜찮겠지’란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이때까지 간단한 감기 이외에 큰 병치레를 한 적이 없었는데 큰 수술에, 몇 개병을 매단 링거 주사에, 복부에 호스로 연결한 소변주머니에, 그게 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회복 중에 장유착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두운 표정의 주치의가 질문을 했다. ‘결핵 앓은 적 있어요?’ 폐에 이상소견이 보인 것이다. 결국 폐전이로 판정되었다. ‘4기’가 된 것이다. 


항암과 호르몬치료를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그때 난 폐전이가 되었어도 치료만 잘되면 되겠지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었나. 그리고 도저히 내가 잘못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이 상황이 최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치료만 잘되면 되지 않을까. 어떤 믿음에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또 한 차례의 장유착을 견디고 미음을 먹는 중에 1차 항암을 하고 퇴원을 했다.




수술, 한 달의 입원, 항암,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괜찮아질거야 하는 믿음만은 변함이 없었다. 2,3일 정도 속이 울렁거리더니 곧 밥도 먹을 수 있었다. 그새 여기저기서 투병정보를 모은 남편과 친정어머니는 나를 위해 현미밥 위주의 식단을 준비해주었고, 아직 기운이 없긴 했지만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난 항암 부작용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김없이 2주가 지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빠지는 머리카락을 주체할 수 없었다. 친정 부모님과 남편과 난 머리를 깨끗하게 밀고 웃으면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머리를 민 나의 모습에 가족들의 마음은 찢어졌겠지만 다들 잘 견뎠고, 나도 머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그것보다도 빨리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모습과 마음이 내가 치료받고 지금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지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져도 결국 갈 길은 하나라는 것, ‘치료 잘 받아서 괜찮아지면 되는 것’이었고, ‘나만은, 나에게는 결코 나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란 믿음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임파선제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왼쪽골반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주치의는 이상이 없을 거라 했지만 2참 항암을 들어가서 간단한 엑스레이 검사를 한 결과, 왼쪽 골반뼈에도 3cm정도의 전이가 확인되었다. 지독한 암세포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방사선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견뎠을까. 현미밥에 야채에 나물반찬을 싸들고 2차 항암을 하러 입원을 했고, 동시에 5주 동안 세브란스 병원에 방사선치료를 하러 매일 다녔다. 방사선 치료가 중반이 넘어가자 계속되는 설사로 인해 헤어진 항문,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별다른 방도가 없다고 했다. 치료가 끝나야 한다는 말만 있을 뿐, 모든 것은 시간이 약이었다.


  


다행히 항암치료는 구토한번 없이 며칠간의 울렁거림으로 지나갔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이였기에 무조건 병원치료만 믿고 있을 수 없었다. 병원 치료도 열심히 받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관련 책을 읽어보고 인터넷에서 찾다 보니 정말 암에 좋다는 수많은 음식과 치료방법들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그 속에서 신뢰와 믿음이 가는 것을 찾아보았다. 암세포는 외부의 바이러스가 침입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결국 내 몸에서 내가 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암, 방사선과 같은 외부 힘을 이용하여 가장 강력하게 암세포를 공격하고 있지만 결국, 암은 내 스스로 이겨내야 할 몫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면역력을 높여서 암이란 녀석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면역요법을 선택하여 병원치료와 병행하였다. 치료가 끝난 이후에도 지속하였는데, 그중 자가주사요법이 있었는데, 근 2년 넘게 엉덩이와 배에 내가 직접 주사를 놓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방사선 치료와 3번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검사를 했다. 과연 나의 믿음대로 항암치료가 효과가 있을까, 초조했다. 그러나 결과는 지금 생각해보면 ‘기적’이었던 것 같다. 폐에 소금을 뿌린 듯 쫙 퍼져 있었던 암세포가 많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까지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나와 대면했던 주치의의 얼굴에서도 모처럼만에 미소가 보였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른 상태, ‘자궁내막암 4기’라는 벗어나기 힘든 나의 기수가 짓누르고 있었다.


6차까지 항암을 한 후, 한 달을 쉬고 검사를 했다. 과연 내 몸속에 그 녀석들이 사라졌을까? 6개월간의 항암치료, 5주의 방사선 치료, 식이요법, 면역요법, 운동과 남편, 친정 엄마를 비롯한 가족의 사랑, 이 모든 것의 힘으로 결국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검사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감사했다.




치료 기간 친정집에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투병생활을 했었는데, 그 동안 어머니는 딸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고 계셨었다. 딸에게 혹시 그 모습이 보일까봐 티내시지는 않았지만 심한 우울증으로 불면증에 시달리시고 입맛을 잃으셔서 체중이 많이 줄어 있었다. 이런 사실도 당시는 내 몸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입원하고 있을 때 밤낮으로 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하시던 어머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어머니를 위해서도 나는 다시 아플 수도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치료가 끝나고 지금까지도 나에 대한 일에서는 특히 건강에 대한 일에서는 너무도 민감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흐트러진 내 생활을 다잡아 본다.




치료는 다행히 끝났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재발의 불안감, 물론 그 누구보다도 나는 괜찮을 거야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투병을 통해서 알게 된 많은 분들과의 이별을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느끼게 되는 불안감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치료는 끝났지만 ‘4기’라는 상태는, 주치의는 치료가 끝난 후에도 재발률이 워낙 높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고, 한 달에 한번 추적 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여전히 불안한 눈길을 나에게 주었다.


 


치료가 끝나면서 이제는 병원에서 해주는 치료가 아닌 온전히 내가 해 나가야 하는 기나긴 투병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여러 정보를 접하게 되고 다행히 병원 치료 막바지에 알게 된 암환자 모임인 ‘시민연대’를 통해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정보와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은 단순히 정보를 얻고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었던 분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로 위안이 되어주고 치유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아! 나만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구나.’


‘아! 나보다 덤 힘드신 분들도 있구나, 나는 그래도 다행이다.’


그 분들과 함께하며 난 위안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강의에 나가서 배우고 집에서 직접 한번 해보고, 그 모든 것은 결코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남편이 함께 했고, 어머니가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준비해 주셨다. 같이 할 수 없었던 다른 가족들은 마음과 사랑을 같이 했다.




시민연대에서 개최하는 암환자를 위한 캠프를 그해 가을에 갔었다. 연초만 하더라도 ‘여행’은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나와 같은 아픔을 겪은 분들과의 여행길에서는 산의 나무, 들에 핀 들꽃 하나하나도 예사로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삶을, 지나온 고통의 시간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서로의 아픔을 달랬었다. 그 당시에도 힘든 상태에서 캠프를 참여한 분들도 있었지만 서로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가슴에 담고 돌아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기서 만난 분들과 소중한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서로 마음 아픈 일이 있으면 같이 아파하고 서로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그 와중에도 고비는 있었다. 치료가 끝난 그 해 가을, 검사 중 임파선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주치의는 재발을 확신했다)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 한 달 넘게 검사에 검사를 거듭했던 일, 다행히 재발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던 날, 다시 한 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바짝 차리고 투병생활에 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은 흘러갔다. 치료 내내 밀었던 머리에는 삐죽삐죽 머리카락이 다시 돋아나고. 몸도 마음도 회복이 되어 나갔다.


항암이 끝나고 2년 정도는 투병을 위한 생활만을 했던 것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녹즙 4-5번 갈아먹고 준비하고, 운동하고, 현미밥을 주식으로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고 그때마다 약을 챙겨 먹고 커피관장하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모르고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생활했다. 혹시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도시락 싸서 나가고. 또 1년간은 숙뜸을 매일 집에서 했었는데, 오소리 잡는 것도 아니고 온 집안에 숙뜸냄새가 배고 매일 숙뜸을 힘들여 만들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그리고 2년간의 투병생활 이후, 복직 2년간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던 시간들이었고, 지금은 다시 다른 이들과의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사회복지라는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있다. 이런 삶의 변화 속에서 무사히 5년이란 시간을 보내왔다.




나의 투병에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난 괜찮을 거란 믿음과,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이었던 것 같다. 그런 믿음과 다짐이 있었기에 열심히 투병생활을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 ‘암’이란 녀석을 만나지 않았음 더 좋았을 테지만, 그래서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치료를 무사히 마쳤고 지금 이 순간까지 재발없이 잘 지내고 있고, 투병 과정에서도 이런 저런 걱정 없이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 나의 치유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시련이 지나가고 있다. 아팠던 기억들도 희미해지고....




투병당시 건강만 하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사람들의 갈등, 고민, 걱정, 이 모든 것이 다 하찮고 부질없는 것들로 보였다. 건강이 회복되면 부질없는 욕심이나 고민, 다른 이들과의 갈등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베풀며 살아야지 했었다. 그런데 인간이란 참 간사하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조그만 일에 화를 내고 여전히 내가 한 행동보다는 남의 행동에 서운해 하고, 몸이 건강해진 만큼 다시 투병을 하며 마음먹었던 초심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아픔을 지금 겪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나누고 용기와 희망을 공유하고 싶다. 시련은 있지만 결코 포기는 없고 희망만이 있을 뿐이란 사실을 같이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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